광명시역사

광명시역사 소개

안녕하세요.
철산호빠입니다.

오늘은 광명시역사에 대해 한번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광명시역사

삼국시대

  • 고구려 장수왕의 남정(南征)으로 고구려의 영토가 되면서 현재의 광명시를 비롯한 안양시 석수동, 박달동, 서울시 봉천동, 신림동, 독산동, 가리봉동, 시흥동, 당산동, 대림동, 문래동, 신길동, 양평동, 상도동, 대방동, 신대방동 일대를 잉벌노현(仍伐奴縣)이라고 칭하였다. 신라 진흥왕 14년(533년)에는 나제동맹(羅濟同盟)을 깨뜨리고 한강유역을 점령하여 이 지역은 신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新州) 신라 경덕왕 16년(757년)에 곡양현(穀壤縣)으로 개칭되면서 율진군(栗津郡)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시대

  • 고려시대에는 태조 23년(940년)에 곡양현을 금주현(衿州 또는 금州)으로 개칭하였다.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된 시기는 성종대로서 성종2년(983년)에 지방제도의 최초인 12목제(牧制)를 실시하였다. 성종14년(995년)에는 전국을 10도제(道制)로 하였는데 양주(楊州), 광주(廣州), 황해(黃海) 등 여러 주현(州縣)을 통합하여 관내도(關內道)라 하였고, 이어 6개의 적현(赤縣)과 7개의 기현(畿縣)을 관할케 하여 모두 상서도성(尙書都省)에 직속시켜 경기(京畿)라 칭하였다.
    현종때에 금주(衿州)는 양광도에 속하여 안남도호부의 예속하에 있었다.
    문종23년(1069년)에 50개군으로 확장되어 금주도 처음으로 경기도 관할하에 예속되었고 공양왕 2년(1390년) 경기도를 좌우로 분정하자 경기좌도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및 대한민국 이전시대

  •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8도제(道制)를 단행하였는데 금주(衿州)를 금천현(衿川縣)으로 개칭하였다. 정조19년(1795년) 금천현을 시흥현(始興縣)으로 개칭하였는데 본래 시흥은 고려 성종대에 금주현의 별호였다. 고종 32년(1895년)에 시흥현이 시흥군(始興郡)으로 승격되어 인천부(仁川府)에 속하였고, 이듬해 경기도에 속하게 되었다. 식민지시대인 1914년 3월 1일부터 시행된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시흥, 안산, 과천 3개군이 시흥군으로 흡수, 통합되었으며 9개 면(面) 83개 리(里)로 편제되었다.

대한민국

  • 해방후인 1949년 8월 14일에 시행된 대통령령 제159호에 따라 북면의 도림리, 구로리, 번대방리가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시흥군에서 분리되었고, 1962년 11월 21일 공포된 법률 제1172호에 따라 신동면 전역과 동면의 시흥리, 독산리, 신림리, 봉천리, 가리봉리가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1970년 6월 10일에는 시흥군 조례 제199호에 의하여 서면 광명리와 철산리의 2개 법정리를 관할구역으로 하는 서면 광명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73년 7월 1일에는 법률 제2597호에 따라 시흥군 안양읍이 안양시로 승격되면서 시흥군에서 분리되었다.
    1974년 6월 1일에는 시흥군 조례 제401호에 따라 서면 광명출장소가 시흥군 광명출장소로 승격되었고 1976년 4월 20일 7개의 분소(分所)가 설치되었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로 서면이 소하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1년 7월 1일 법률 제3425호에 의하여 소하읍과 광명출장소가 광명시로 승격되어 시흥군에서 분리되었다.

출처 광명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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